잡담/휴식시간

신형철의 문장들 (from. 느낌의 공동체) Part. 3

미아스마 2022. 12. 6.


 그리고는 덧붙인다, 카버를 읽어라

-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비평가란 본래 과장하기 좋아하는 족속이다. '경천동지할 걸작' 혹은 '구제 불능의 쓰레기'라는 표현을 만지작거리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그러나 그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모든 종류의 최상급 형용사들과 싸워야 한다. 카드를 다 써버리면 나중에 어쩔 것인가. 그런데 못 참겠다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어떤 비평가가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일러 '가장 완벽한 단편' 운운하는 걸 보고, 또 한 비평가가 백기를 들었구나, 했다.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그제야 「대성당」을 찾아 읽었다. 뭐랄까 완벽한 단편이었다.

 

이 소설은 편견과 소통에 대해 말한다. 부정적인 견해만 편견인 것은 아니다. 내가 몸으로 체험하지 못한 앎, 한 번도 반성해보지 않은 앎은 모두 편견일 수 있다. 이를테면 맹인이 아닌 자가 맹인에 대해 갖고 있는 견해란 것은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편견의 테두리 밖에 있기 어렵다. 그 편견은 어떻게 깨어지는가.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소설은 많다. 그러나 편견이 녹아내리는 과정을 이렇게 자연스럽고 힘 있게 그려낸 소설은 많지 않다.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후배들에게 가끔 주제넘은 충고를 한다. 나 자신은 소설을 단 한 줄도 써본 바 없으면서 말이다. "인물의 내면을 말로 설명하겠다는 생각을 접어라. 굳이 말해야 한다면, 아름답게 말하려 하지 말고 정확하게 말해라. 아름답게 쓰려는 욕망은 중언부언을 낳는다. 중언부언의 진실은 하나다.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장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 장악한 것을 향해 최단거리로 가라. 특히 내면에 대해서라면, 문장을 만들지 말고 상황을 만들어라" 그리고 덧붙인다 "카버를 읽어라".

 

일본에서 카버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한국어판 『대성당』을 번역한 사람은 소설가 김연수다. 김연수가 누구인가. 이를테면, 일이 년에 한 권씩 책을 내는데, 그러고 나면, 당신이 책 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상이 주어지고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는, 그런 부류의 작가다. 하루키와 김연수라니. 어쩐지 공정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장의 국가 경쟁력이랄까. 그런 차원에서 말이다. 이제는 하루키의 문장으로 카버를 읽는 일본 독자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

- 구스타프 야누흐의 『카프카와의 대화』

인간 카프카의 모습을 지인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의 매력이다. 카프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결벽증적으로 엄격했다. 그는 자기 책이 출간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친구들의 강권으로 출간했을 뿐. 구스타프가 그의 단편 세 편을 가죽 장정으로 제본해서 갖다주었을 때는 숫제 화를 내기까지 한다. 이따위는 불에 태워 없애버려야 한다고.

 

"……내 서투른 글은 모두 없어져야 해요. 나는 빛이 아니에요. 나는 그저 나 자신의 고통의 근원으로 빠져들 뿐이에요. 나는 막다른 골목이에요." (341-342쪽) 그러니 카프카가 이 책의 존재를 반기지 않을 것임은 명백하다. 그러나 카프카라는 '막다른 골목'이 누군가에게는 출구가 되기도 하는 것을 어쩌랴.


 

 마음 공부와 몸 공부의 참고서들

- 김소연의 『마음사전』과 권혁웅의 『두근두근』

두 사람의 공통점을 하나를 말하겠다. 좋은 문장에도 등급이 있다. 좀 좋은 문장을 읽으면 뭔가 도둑맞은 것 같아 허탈해진다. '아이쿠, 내가 하려던 말이 이거였는데.' 더 좋은 문장을 읽으면 뿌연 안갯 속이던 무언가가 돌연 선명해진다. '세상을 보는 창 하나가 새로 열린 것 같아요' 더 더 좋은 문장을 읽으면 멍해진다. 그런 문장을 읽고 나면 동일한 대상을 달리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그 문장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라면 나는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이런 문장, 두 사람의 책에 매우 많다.

 

사소한 차이 하나를 말하겠다. 김소연은 마음에 대해 말할 때 학살, 처형, 난사 같은 무서운 말을 태연하게 쓴다. 아무래도 마음이라는 것은 전쟁터일 테니까. 그 말들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우서운 말이란 본래 아주 슬픈 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권혁웅은 우리가 잘 모르는 단어를 찾아내서 쓰기 좋게 세공하거나 잘 알지만 음미해 본 적 없는 단어를 환하게 되살려놓는다. 말을 애무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의 글을 보면서 '자동사적 글쓰기(롤랑 바르트)'란 게 이런 거구나 했다. 아무래도 시인에게는 말이 애인일 테니까.

 

소설가 박상륭 선생은 일찍히 몸과 맘(마음)과 말을 합쳐 '뫎'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몸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순차적 개벽이 필요함을 설법하기 위해서였다. 그 논의와 무관한 자리에서 보더라도 몸과 마음과 말은 본래 떨어질 수 없는 덩어리다. 김소연은 마음과 말을, 권혁웅은 몸과 말을 엮었다. 그러나 마음과 몸이 어찌 각방살이를 하겠는가. 각각 마음 공부와 몸 공부에 매진하는 이 두 사람의 책은 서로가 서로의 참고서다. 이미 스스로 당당한 사유들이지만 함께 읽으면 더불어 풍성해질 것이다.


 한 편도 다시 읽고 싶지 않다

- 정지아의 『봄빛』

한국 문단에서 통용되는 리얼리즘 개념에 대해서는 애증이 있다. 좁은 의미의 리얼리즘은 갑갑하다. 재현되어야 할 '현실'이라는 것이 자명하게 존재한다고 전제하니까. 넓은 의미의 리얼리즘은 공허하다. 삶의 진실에 도달하는 여러 길을 모두 리얼리즘의 슬하에 두려 하니까. '지성'이 없는 우직한 재현과 '감각'이 없는 스타일을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경우도 더려 보았다. 그러나 지성과 감각이 있는 리얼리즘, 거기에다 진심과 열정까지 더해진 리얼리즘은 잔재주들이 결코 범접할 수 없는 기품에 도달한다.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체커는 1930년대 말에 뒤늦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을 읽은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이것이 철학이다." 『봄빛』에 대해서라면 내 생각은 이렇다. 나는 한 편도 다시 읽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소설이다.


 

 문학이 된 평론을 읽는다

- 정홍수의 『소설의 고독』

영화평론은 영화가 될 수 없고 음악평론은 음악이 될 수 없지만 문학평론은 문학이 될 수 있다. 문학평론이 가장 위대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문학평론은 그만큼 특수하다는 얘기다. '뭔가'에 들러붙어서 바로 그 '뭔가'가 되는 유일한 글쓰기다. 이것은 축복받은 특수성이 아닌가. 그렇다면 문학평론이 문학이 되기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어떻게 하면 문학이 되는가. 글 안에 내면과 문장이 버티고 있어야 한다. 진리를 대변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내면의 격량을 드러내는 목소리, 무색무취의 보편 문장이 아니라 스타일에 대한 고집으로 충전된 문장 말이다.

 

이 간단한 정담을 어떤 이는 모르고 또 어떤 이는 모르는 척한다. 모르는 분이야 그렇다 쳐도 모르는 척하는 분이 만다는 것은 좀 문제다. 나는 문학평론만큼 보수적인 '글쓰기 제도'를 알지 못한다. 후자인 분들은 평론을 위대하게 만드는 내면이나 문장 따위가 아니라 통찰과 논리라고 말씀하신다. 맞다. 좋은 글을 만드는 힘의 90퍼센트는 통찰과 논리가 감당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좋은 '글'일 뿐이다. 좋은 칼럼, 보고서, 논문과 다르지 않다. 나머지 10퍼센트에 해당하는 것이 내면과 문장이다. 바로 그 10퍼센트가 평론을 '글'이상의 '문학'으로 만든다.

 

평론가라면 가끔은 무모한 베팅도 하고 세사으이 취향과 독야청청 싸우기도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대신 그는 다른 일을 해왔다. 발터 벤탸민은 장터에서 구라를 푸는 과거의 이야기꾼과 골방에서 내면을 파먹는 근대 소설가를 대조하면서, 소설은 고독한 개인의 작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평론집의 제목 '소설의 고독'이 거기에서 왔다. 그 고독과 소통하는 이링 지난 12년 동안 그의 일이었다. 사려 싶고 겸허하고 다정다감한 이 '한국의 순수 문학' 애호가 덕분에 많은 소설가가 잠시나마 고독을 잊었을 것이다.


 

코멘트

이 책은 10년 이야기라 이치에 맞지 않는 내용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평론은 소비자, 대중, 독자들과의 소통의 창구이다. 특히 대중문화에서는 당하다고 생각한다. 음악평론이 비록 음악이 될 수 없더라도, 대중문화평론은 대중문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지금의 문학평론은 문학을 보지않을 뿐더라 대중을 수용하지 못있다. 이는 곧 장르의 소멸을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먼저 현대 문학의 자폐성은 서서히 대중들을 회피해왔고 문학평론마저 잃었다. 그리고 이슈를 만들지 못했다. 시대를 이야기해야 함에도 한쪽에 치우쳐진 문학들만 양산되었다. 이런 비슷한 문체의 작품들이 라노벨의 이세계물과 다를게 뭔가. 중요한 것은 대중이고, 문학에서 이야기하는 '독자'라는 존재이다. 이를 잊어버린다면 문학평론의 고독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느낌의 공동체
<몰락의 에티카>의 저자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첫 번째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이 책은 저자가 2006년 봄부터 2009년 겨울까지 <경향신문>과 <한겨레21>, <대학신문>, <시사IN>, 청소년 잡지 <풋>을 통해 연재했던 짧은 글들을 엮은 것이다. 저자는 자신에게 다가와 결코 되찾을 수 없을 것을 앗아가거나 끝내 돌려줄 수 없을 것을 놓고 간 좋은 작품들을 통해 느낀 것을 문장으로 옮겨보려 했고 이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했다. 시인과 시집, 세상, 소설, 영화 등의 문학을 사랑한 저자는 그들과 마주하며 느낌의 세계로 들어갔다. 강정 시인부터 황병승 시인까지 모두 10명의 시인과 시인의 시세계를 되돌아본다. 또 저자가 읽은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의 고전과 앞으로 고전이 되기에 충분한 텍스트에 대한 애정을 확실히 드러내는 등, 이 책에 수록된 짧은 산문들이 저자가 만난 순간순간의 느낌을 오롯이 전해주고 있다.
저자
신형철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11.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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