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휴식시간

신형철의 문장들 (from. 느낌의 공동체) Part. 2

미아스마 2022. 12. 6.


그러니까 선배님들, 힘내세요

-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쓸쓸하다. 이 쓸쓸함이 이 시집에 흥건하다. 그러나 밥을 버는 일, 그거 하찮은 일 아닐 것이다. 밥을 버느라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말하기보다는 무언가를 희생하면서도 밥은 벌었다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밥을 벌고 싶어도 못 버는 많은 이들이 훨씬 더 쓸쓸한 세상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 시인이 밥벌이의 지겨움을 토로하면서 청춘과 시를 잃어버린 아픔을 말할 때에도 마음이 짠했지만, 밥벌이의 준엄함을 인정하면서 삶을 견뎌내는 시들에 더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다시 "나쁜 소년"이 되겠다는 이 오기가 좋다. "무슨 법처럼"이라는 비유는 다짐 같아서 멋지다. 이 오기와 다짐 덕분에 다시 돌아올 수 있겠지. '밥과 시'가 상극이라는 게 과연 사실일지라도 선배들이 그렇게 말하면 쓸쓸해진다. 밥벌이를 포기하지 않고도 시를 껴안는 일, 그게 후배들이 선배들에게서 보고 싶은 모습이다. 그러니까 선배님들, 힘내세요. 푸른 잉크 한 통을 다 마시는 한이 있어도.

 

백문이 불여일청

- <어떤 날>에서 <언니네 이발관>까지

 

오늘은 시 말고 노랫말을 읽자. 언젠가 한번은 그러려고 했다. 시의 본적은 노래니까. 본래 노랫말이었으나 노래와 분리되어 떨어져나오면서 지금처럼 눈으로 읽는 시가 되었다. 그러니 시와 노랫말은 여런히 은밀한 혈족이다. 다른 이유도 있다. 중요한 것은 시라는 '제도'가 아니라 '시적인 것' 그 자체라는 것.

 

대중음악의 노랫말 속에도 시적인 것이 발견된다면 그 노랫말들이 시라는 이름으로 발표되는 제도적 생산물과 달리 취급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주의해야한다. 대중음악의 노랫말에 완강한 문학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고리타분한 짓이다. 대중음악에 나름의 룰이 있듯이 대중음악의 노랫말에도 불가피한 문법이라는게 있으니까.


시인의 직업은 발굴

- 김경주, 『기담』

우리는 모두 무릎에 피를 흘리면서 세상의 출발선을 떠나고, 타인의 무릎에 손을 올려놓고 회한의 세월을 다스린다. 그러니 화석에서 죽은 짐승의 울음소리를 듣는 재주를 가진 시인 김경주가 무릎은 상처의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덧붙일 만하지 않은가.

 

언젠가 이 자리에서 나는 시인의 직업은 '문병'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덧붙이자. 시인의 직업은 '발국'이다. 오늘 저녁에는 당신을 발굴해보시길. 당신의 몸속에 매장되어 있는 울음소리를, 무릎에 새겨진 상처의 문양을 들여다보시길. 어쩌면 그것들이 죄다 시일지도 모르니까.


읽어야 할 것투성이

- 다니카와 슈운타로의 『이십억 광년의 고독』과 김기택의 『껌』

슬픈 얼굴을 그저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 그 자체를 '읽고' 있다. 슬픔이 무슨 생명체인 양, 그 행보와 속내와 귀추를 따라가고 있다. '읽어낸다'는 건 이런 것이다. 이에 관한 한 김기택은 독보적이다. 슬픔, 죽음, 속도 같은 뿌연 개념들이 주어의 자리를 꿰차고 막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노라면 서스펜스가 느껴질 정도이다.

 

특히 위의 시는 특유한 냉철한 '읽어내기'가 어떤 정서적 울림까지 품고 있는 경우라서 골랐다. 시를 쓰려는 학생들에게 '관찰과 묘사'의 전범이 되는 시도 물론 좋지만, 예컨대 "그날 밤 연인에게 키스를 거절당한"사람이 감정이입까지 할 수 있는 시라면 더 좋지 않겠는가(이 시인의 좋은 시가 특히 그렇다).

 

정말이지 이 세상엔 읽어야 할 것투성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남자는 '연인의 얄궂은 미소'를 읽고, 유도를 하는 사람은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어떤 시인은 '슬픔'의 운동을 읽고, 우리는 시집을 읽는다.

 

감전의 능력

- 안현미, 「옥탑방」

릴케의 말에는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지만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으려고 애썼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시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이라면 젊을 때 충분히 가지고 있다.

 

시는 체험이다." (『말테의 수기』) 뭄엇을 체험해야 하나. 친절하게도 릴케는, 아침에 작은 꽃이 피어나는 몸짓, 기이하게 시작되는 어린 시절의 병들, 진통하는 여자들의 비명 등을 이야기해주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건 이런 것. "창문이 열린 방 안에서 죽은 사람 곁에 그리고 치미는 흐느낌 곁에 있어보았어야 한다."

 

'감정'을 투정 부리듯 늘어놓는 것이 시가 아닌 건 맞겠지만, 그렇다고 시는 곧 '체험'이라고 단정해도 될까? 이 말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기구한 삶에서 좋은 시가 나온다고 할 수밖에 없겠네. 게다가 나이를 먹을수록 체험도 풍성해질 테니 인생을 모르는 핏덩이들은 더 기다려야 하겠고.

 

그러나 아니지. 중요한 건 체험의 부피가 아니라 전압이지. 무엇이건 더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는 능력, 즉 감전(感電)의 능력. 그래서 생겨나는 언어, 그 언어에 흐르는 전류. 이건 나이와 아무 상관없어. 그 뒤로 20년 정도 더 살기는 했지만 사실상 랭보는 이미 십대 후반에 감전사한 거지. 감전의 천재가 자기 자신에게 타살된 거야.


동화의 아픈 뿌리

- 강성은,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대부분의 시는 개인적 불행과 사회적 비극이 분리 불가능한 채로 뒤섞여 있고, 이것이 그 성분들의 흔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돼서 동화적 단순성에 도달한, 강성은 특유의 '이미지-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이 대목이 이 시비의 핵이다. 그 이야기들은 대게 '이상한'과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의 지휘를 받는데, '이상한' 것을 말하는 세편의 시(「이상한 여름」, 「이상한 욕실」, 「이상한 방문자」)와 '아름다운' 것을 노래하는 두 편의 시(「아름다운 불」, 「아름다운 계단」)만 그런 게 아니라, 이 시집의 전체가 그렇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개성은 이상한 것에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것에서 이상한 것을 읽어내는 창조적인 괴벽에 있다. 그 결과 그녀의 좋은 시들은 궁극적으로 '이상하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상태에 도달하는데, 사실 이는 좋은 시의 기본적인 덕목이기도 하다.

 

이 '세헤라자데'의 매력적인 이야기들을 "삶과 문명과 현실원칙을 향해 보내는 조소"(남진우)로 읽는 데 나는 동의하지만, 시 자체가 짓고 있는 표정은 '비웃는 미소'라기보다는 '슬픈 미소'에 더 가깝다는 말을 덧붙이자. 그 미소에 대해 더 자세히 말하지 못해 아쉽다. 책날개에 있는 시인의 미소를 참조해서 직접 읽어보시길.


음악은 진보하지 않는다

- 고 유재하 기일에 부처

사랑 노래가 유독 아름다웠지만, 삶을 성찰하는 노래들 역시 지극하고 깊었다.

 

그 노래들은 격렬한 1980년대에 이십대를 산 어느 청년의 여린 내면을 희미하게 품고 있다. "이리로 가나 저리로 갈까 아득하기만 한데. 이끌려가듯 떠나는 이는 제 갈 길을 찾았나.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을" (<가리워진 길>) 그의 요절이 이 노래를 더욱 사무치게 한다. 그가 길을 찾자마자 그의 여행은 끝나버렸다. 그러나 그는 죽어서 스스로 길이 되었다. 김현철, 조규찬, 유희열 등이 그 길 위를 걸었다.

 

우둔하고 천박한 음악들에 지친 마음이 다시 그를 찾게 한다. 그의 순정한 노래들은 늘 거기에 있다. 옛날의 노래들은 늘 지금의 노래보다 아름답다. 시간이 흘러도 훼손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우리가 어리숙하다 해도, 나약하다 해도, 강인하다 해도, 지혜롭다 해도, 유재하는 언제나 스물다섯 살 청년의 목소리로 우리를 위로한다. 고인의 20주기에 <사랑하기 때문에>를 다시 듣는다. 이 곡의 도입부 35초를 이 세상의 어떤 음악과도 바꿀 생각이 없다. 아, 이것은 20년 전의 음악이다. 음악은 진보하지 않는다.

 

 
느낌의 공동체
<몰락의 에티카>의 저자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첫 번째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이 책은 저자가 2006년 봄부터 2009년 겨울까지 <경향신문>과 <한겨레21>, <대학신문>, <시사IN>, 청소년 잡지 <풋>을 통해 연재했던 짧은 글들을 엮은 것이다. 저자는 자신에게 다가와 결코 되찾을 수 없을 것을 앗아가거나 끝내 돌려줄 수 없을 것을 놓고 간 좋은 작품들을 통해 느낀 것을 문장으로 옮겨보려 했고 이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했다. 시인과 시집, 세상, 소설, 영화 등의 문학을 사랑한 저자는 그들과 마주하며 느낌의 세계로 들어갔다. 강정 시인부터 황병승 시인까지 모두 10명의 시인과 시인의 시세계를 되돌아본다. 또 저자가 읽은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의 고전과 앞으로 고전이 되기에 충분한 텍스트에 대한 애정을 확실히 드러내는 등, 이 책에 수록된 짧은 산문들이 저자가 만난 순간순간의 느낌을 오롯이 전해주고 있다.
저자
신형철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11.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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