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휴식시간

신형철의 문장들 (from. 느낌의 공동체) Part. 1

미아스마 2022. 12. 6.


서론

1. 대학시절 비평을 공부할 때 가장 많이 영향을 줬던 분이 바로 신형철 평론가이다. 문학평론을 주로 쓰시긴 했지만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했고, 음악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그런 글들을 보면서 비평이라는 장르적 내러티브를 배우게 되었고 문장의 몰입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2. 일반인이 된 지금도 글을 쓰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신형철 평론가의 평론집 또는 산문집을 찾아 읽고 있다. 복합적인 글쓰기가 되지 않을 때, 너무 비평이라는 딱딱한 형태에 매몰되어 있을 때 자주 찾는다. 또 평론이라는 글 역시 '느낌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망각할 때 꺼내든다.


낭만적 혁명주의

- 박정대,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이 치열한 다국적 자본주의 시대에 <내일을 향해 쏴라>가 웬 말 인가. 그런데 이런 구절들이 왜 일렁이는 것일까. 그의 목소리 때문이다. 그는 한낱 예술가의 위치에서 발화한다. '밥 딜런'을 들으며 은행을 털겠다고 말하는 이는 강도도 혁명가도 아니다. 그는 그저 '밥 딜런'을 사랑하는 무명 예술가일 뿐이다.

 

이 목소리는 학자의 현학과 정치가의 야망이 없다. 그 순정함이 우리의 경계심을 눅이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거덜 낼 거야" 운운하는 치기가 그냥 아름답게 들리고 마는 것이다. 이 기묘한 '무드'가 그의 매력이다. '혁명적 낭만주의'라는 것이 있거니와, 이 시인의 경우는 '낭만적 혁명주의'라고나 할까.


우리 시대의 시모니데스

- 이시영,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는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시영의 최근 시들은 사태들을 향해 '충분히 가까이'간다. 그러면서 그가 발견한 것과 끝내 시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한 장의 사진 같다. 이것은 '시적인 것'을 발견하는 신선한 기술이면서 시가 '윤리적인 것'에 도달하게 만드는 지극한 태도이기도 하다.

시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올바른 시는 드물다. 시가 아직도 공공영역이라고 믿는 시인은 더더욱 드물다. 드문 시인의 드문 시집 한권을 읽는 데 걸린 시간은 한 시간이 채 안된다. 그 한 시간 동안 독자는 '이런 식으로 써도 되는 것인가'하는 놀라움과 '이런 것이야 말로 진정한 시가 아닌가'하는 감동을 동시에 맛보면서 어리둥절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한 시간을 빼앗아 거기에 이 시집을 놓아두고 싶다.


모국어가 흘리는 눈물

- 허수경, 「나의 도시들」, 「여기는 이국의 수도」

구구절절 설명하고 목청 높여 분노하고 거창한 대안을 도모하는 시들은 이 울음 앞에서 무력하다. 모국어의 가장 섬세한 유역에서 흐르는 이 눈물이 이제는 세계적인 보편성의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보는 일은 감동적이다. 누군가의 수사법을 빌려 말하건대, 만약 허수경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녀를 발명해야 했을 것이다. 그녀 덕분에 다시 되새긴다. 문학은 절망의 형식이다. 우리의 나약하고 어설픈 절망을 위해 문학은 있다. 그리고 희망은 그 한없는 절망의 끝에나 겨우 있을 것이다.


비애와 더불어 살기

- 조용미,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생각하지 말아야 할 사람은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듣지 말아야 할 음악은 듣지 말아야 하고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 요즘 같은 날씨에 자칫 방심했다간 이유 없는 비애가 몰려와서 하루를 망치게 된다. 아니다. '이유 없는'이라는 말은 틀렸다. 이 세상에 이유 없는 비애는 없다. 너뭄 낳은 이유가 있거나 인정하기 싫은 이유가 있을 뿐. 아니다. 히포크라테스에 따르면 사람은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그중 몸에 '검은 담즙'을 뜻하는 '멜랑콜리'가 오늘날 우울증의 명칭이 된 것은 그래서다.

토성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에게 멜랑콜리는 평생의 벗이다. 수전 손택에 의하면 비평가 벤야민이 그런 유형이었던 것 같다. 친구 숄렘은 '심오한 슬픔'이 그의 특지잉라 했고, 프랑스인들은 그를 '슬픈 사람'이라고 불렀다니까. 그런 유형은 "느리고 우유부단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칼을 들고 자신의 길을 내며 가야 한다. 때로는 칼날을 스스로에게 돌려 끝을 내기도 한다." 그러니 벤야민의 자살은 어쩌면 파시즘과 토성의 합작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담즙이나 토성 따위와 무관한 사람이라고 그 칼로부터 안전할 수 있겠는가. 어떤 비애는 칼이 되어 나를 겨눈다. 이 비애를 어찌해야 하나.


선생님, 신과 싸워주십시오

- 신경림, 『낙타』

젊은 시인들은 신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신과 대화하기보다는 신을 모독하려 합니다.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길입니다. 신과의 대화는 우리 시대 큰 어른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참혹에 눈물을 흘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 엉망인 세계를 누군가는 책임져야 한다고 신을 향해 말할 때 '투쟁하는 형이상학'이 시작될 것입니다. 준엄하게 신을 기소하는 법정에 한국 시는 거의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다음 작업을 떨며 기다릴 것입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이른 시일 내에 찾아뵙지 못하더라도 부디 노여워하지 말아주십시오. 멀리서 경외하는 이가 실은 더 끈질긴 법이니까요. 늘 건강하십시오, 선생님.


아름다운 엄살, 실존적 깽판

-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소설 이론 쪽에는 '문제적 개인' (루카치)이라는 개념이 있다. 시쪽에서는 '문제적 자아'라는 개념을 사용해볼 수 있을까. 반성하고 감동하고 배려하는 자아 말고, 시비 걸고 자학하고 투덜대는 자아 말이다. 우리는 시의 '나'가 반드시 시인의 '자아'와 일치할 필요는 없다고 믿는 편이지만, 이런 문제적 자아의 시는 인텔리겐치아와 프티부르주아의 틈새에서 고해성사처럼 쓰이기 때문에 죄의식이 물컹물컹 배어나와 아프다. 요즘 시에서 이런 '자아'가 드물고, 이런 자아의 '육성'을 듣기가 수비지 않고, 육성으로 울려오는 '엄살'을 만나기도 어렵다. 이 모든 것이 이 시집을 "빛나는 폐허"로 만든다.

 

우리가 엄살이라 부르는 것은 아픔을 유난히 예민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화려하게 표현하는 능력이다. 이 '문제적 자아의 엄살'에는 계보가 있다. 5.16 이후 김수영의 시가 그랬고, 10년 전 황지우의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가 최근에는 장석우너의 시집 『아나키스트』가 그러했다. 이 시인들의 시에는 공통점이 있다. 성자는 못되지만 죽어도 '꼰대'는 아니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쓰는 실존적 '깽판'으로서의 시. 그래서 '형'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나, 형의 기분 알 거 같아요, 저도 이 시대가 지긋지긋해요. 그 '빛나는 폐허'에 나도 끼워줘요. 그러나 시적 엄살은 전명성이 높지만 흉내내기는 어렵다.

아름다운 엄살 이전에는 숱한 몸살의 시간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 사랑이지만, 더 많이 아파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 시다.

 

 
느낌의 공동체
<몰락의 에티카>의 저자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첫 번째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이 책은 저자가 2006년 봄부터 2009년 겨울까지 <경향신문>과 <한겨레21>, <대학신문>, <시사IN>, 청소년 잡지 <풋>을 통해 연재했던 짧은 글들을 엮은 것이다. 저자는 자신에게 다가와 결코 되찾을 수 없을 것을 앗아가거나 끝내 돌려줄 수 없을 것을 놓고 간 좋은 작품들을 통해 느낀 것을 문장으로 옮겨보려 했고 이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했다. 시인과 시집, 세상, 소설, 영화 등의 문학을 사랑한 저자는 그들과 마주하며 느낌의 세계로 들어갔다. 강정 시인부터 황병승 시인까지 모두 10명의 시인과 시인의 시세계를 되돌아본다. 또 저자가 읽은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의 고전과 앞으로 고전이 되기에 충분한 텍스트에 대한 애정을 확실히 드러내는 등, 이 책에 수록된 짧은 산문들이 저자가 만난 순간순간의 느낌을 오롯이 전해주고 있다.
저자
신형철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11.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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