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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러브리티 '셀럽' 이해하기

미아스마 2022. 12. 6.
친숙한 이방인은 역사에서 새롭지 않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그런 인물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상상했다. 그 인물들은 물리적으로 멀리 있지만 어떻든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바뀐 점도 있다. 종류가 엄청나게 늘어났으며, 마치 밀물처럼 우리 삶에 젖어들고 있다. 그 인물들과 그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는 흘러넘치다 못해 곳곳에 퍼져 있다. 잘 알다시피 오늘날 그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거나 속편일 뿐이다. 진실이든 아니든 간에 이야기는 그것 자체로 잠시 멈췄다가 어느새 끝없이 이어진다.

토드 지틀린Todd Gitlin, 『무한 미디어Media Unlimited』, 2001, p22

 셀러브리티란 무엇인가?

​먼저 몇 가지 관점을 살펴보자.

 

첫째, 대중 매체 비평에서 대중 지식인과 논평자들은 요즘의 셀러브리티 '문화 변동의 불쾌한 징후'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문화는 영속적인 것, 문자화된 것, 합리적인 것을 제치고 순간적인 것, 시각적인 것, 감각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둘째, 셀러브리티를 소비하고 여기에 몰입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명성을 타고난 '천부적' 자질 탓으로 설명한다. 이런 자질들은 몇몇 특출한 존재만이 지니고 있으며, 산업계의 텔런트 스트우트들이 '발굴'한다. 대중지, 팬진, 텔레비전, 영화 산업은 셀러브리티의 자질을 선전적이고 신비로운 속성으로 정의한다. 저널리스트, 기자, 홍보 담당자들은 셀러브리티의 '존재감', '스타 기질', '카리스마'를 입에 올린다.

 

셋째, 이런 방식과는 완전히 상반된 해석이 존재한다. 대체로 학술 문헌, 특히 문화 연구와 미디어 연구는 셀러브리티를 숱한 문화적 과정과 경제적 과정의 생산물로 취급했다. 이런 문헌들은 홍보와 광고, 프로모션을 통해 개별 유명인이 상품화되는 과정을 탐구했으며, 또한 그 유명인이 문화적 정체성의 형성과 협상 과정에서 발휘하는 영향력을 검토했다. 특출난 개인을 다루는 미디어의 재현 전략에 주목한 것이다. 특히 문화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 미디어 작동에서 유명인의 생산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필수 요소가 되었다.


 대니얼 부어스틴의 설명

대니얼 부어스틴(Daniel Boorstin)은 셀러브리티에 관해 널리 인용되는 격언을 남겼다. "셀러브리티는 유명세 때문에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1971)". 부어스틴에 따르면 셀러브리티는 '인간의 위대함에 관한 우리의 지나친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셀러브리티는 직업적 성취 같은 탁월한 업적을 달성하는 과정이 아니라, 공개된 공연장에서 자기의 개성(=대중적 페르소나)과 경쟁자들의 개성을 구별할 수 있어야 획득될 수 있다. 요컨대 영웅적 인물은 자기가 성취한 업적이나 '위대하고 순수한 인품'으로 부각되지만, 유명인들은 '대체로 자기의 사소한 개성'을 앞세운다. 그러므로 부어스틴이 볼 때 연예인들이 셀러브리티 반열에 올라서는 일은 놀랍지 않다. '그런 사람들은 개성을 미묘하게 차별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부어스틴의 설명에는 분명 유명인을 비판하던 그 당시(1961년) 풍토가 스며들어 있다. 부어스틴은 당대의 미국 문화에서 진정성의 본질이 사라졌다고 몰아붙였다. 진정성이 없는 미디어 연출이 미국 문화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어스틴은 미디어 연출을 '유사 사건Pseudo event'이라 부르는데, 전적으로 미디어를 위해 계획되고 각색된 사건을 말한다. 유사 사건, 또는 가짜 사건은 공정한 평가보다는 엄청난 보도량 때문에 뉴스 가치를 획득한다. 이런 논리에 따라 셀러브리티는 유사 사건의 인간적 등가물이며, 미디어를 위해 만들어진 '인간 유사 사건'이다. 셀러브리티들은 미디어에 등장하는 규모와 영향력에 따라 평가될 뿐이다.

 

부어스틴은 탈근대론을 상징하는 상대주의를 옹호하지 않았다. 이런 식의 염려는 분명 진실하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공유한 것이다. 그러나 대중문화의 흐름을 향한 엘리트주의 비판은 요즘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기나긴 역사를 가져싿. 이를테면 유행은 새롭게 등장할 때마다 문명의 종언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의 심층적 동력에는 대중문화 실천이 함축한 민주적 차원과 대중적 차원을 향한 엘리트들의 혐오가 실제로 존재한다. 그렇게 때문에 엘리트주의 비판을 통해서대중문화의 실천과 양상이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존 스토리의 셀럽

존 스토리(John Storey)는 『대중문화의 발명Inventing Popular Culture』에 쓴 서문에서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의 논평을 환기시킨다. 『문화와 사회Culture and Society』에서 윌리엄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수세기 동안 민주적으로 확장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문화의 성격과 조건을 이해하는 데 에너지를 쏟지 않고, 오히려 그런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을 뿐이다". 이 구절은 부어스틴을 통해 내가 제시한 전통적인 분석과 논평이 지닌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또한 윌리엄스의 언급은 전통적 해석과는 전혀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좀 더 사회학적으로 설명하면 이런 변화는 대면 문화의 상실로 간주되며, 오늘날 사회적 조건과 정치적 조건이 인간관계를 해체하고 파편화한다는 관점에서, 따라서 공동체의 상실이라는 관점에서 흔히 평가된다. 그 결과 현대 생활에서는 감정이 점점 더 메말라가고 심지어는 친밀한 관계조차 점점 더 해체된다. 공동체 문화가 아니라 핵가족이나 확대 가족 현상에서 우리는 공동체 상실의 징후를 발견하며, 개별 가족과 좀 더 넓은 교외 지역 공동체의 분리에서도 동일한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직접적인 사회적 관계의 축소는 유사 사회적 상호 작용으로 대체된다. 이제 상호 작용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상당한 사회적 거리를 두고서 일어난다. 이를테면 우리는 대면 관계가 없어도 자기가 주목하고 숭배하는 셀러브리티를 향유할 수 있다. 요컨대 공동체의 상실은 셀러브리티에게 기회를 안겨줬다. 우리는 공동체 대신에 셀러브리티들을 얻었다. 우리는 유명인에게 열광적인 관심을 보내고, 그 인물과 나의 관계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게 된다. 실제로 유명인들은 미디어를 통한 공동체 건설의 새로운 도구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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