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휴식시간

이 시집은 다리(足)가 없어 거꾸로 읽어야 합니다 │ 신해욱, 『무족영원』

미아스마 2022. 12. 5.
아케이드를 걸었다

가게가 많았다

물건이 많았다

사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잘 떠오르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무지개떡 같은 것

리본 같은 것

아니면 장래 희망 같은 것

웃음이 나려고 했다

주마등 같은 것

축복 같은 것

휘두를 수 있는 낫과 호미와

녹다가 만 얼음 같은 것

아케이드를 걸었지 허락도 없이

전단지를 밟았다

비닐우산이 일제히 펼쳐지는 소리를 들었다

영원한 충격에 사로잡힌 얼굴을 보았다

아케이드를 걸었다

누구나 나를 앞질러 갔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신해욱, 「아케이드를 걸었다」


신해욱은 느낌을 가지고 있다.

 

『생물성』을 통해 이 느낌을 완성시켰고, 『syzygy』에서 확장시켰다. 이 느낌은 감히 설명될 수 없다. 단언이기도 하고 죽음이기도 하고 외로움이기도 하고 슬픔이기도 하다. 다만 이 느낌은 간결함에 의해 공통 지어질 수 있기에 우리는 느낌이 있다고 표현한다. 황인찬 시인의 간결함이나 오규원 시인의 『두두』의 미니멀리즘과는 사뭇 달랐다. 동료 시인들과 비교해도 달랐다. 습기가 가득한 진은영에 비해서 건조했으며, 딱딱해서 언어가 갈라진 김행숙에 비해서 말랑했다. 그렇다고 이제니처럼 푹신하지도 않았다. 간결함은 어중간한 위치에서 간절함을 표현했다. 이 또한 신해욱이 지닌 장점이었

 

신해욱은 다른 시인들과 달리 첫 번째 시집 때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지 못했다. 간결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간결하지 못했다. 여기서 미완성된 간결함은 시적인 절박함을 가져다주었나보다. 신해욱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생물성』을 통해 시인으로써의 존재감을 뽐낸다. 신해욱은 다작(多作)을 하지 않기에 완성도가 뛰어났다. 남편인 이장욱 시인 겸 소설가 겸 비평가가 이것저것 작품 활동을 하는 동안 신해욱은 오로지 시에만 집중했다. 이런 부부의 다른 모습은 다른 결과를 보여주었다. 이장욱 시인은 초창기 시집 때 찬사를 받았지만 지금의 시집에 와서는 긴장감이 떨어진 상태였고, 신해욱 시인은 계속해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신해욱 시인의 시집은 언제나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2019년 『syzygy』이후 5년 만에 신해욱은 새로운 시집을 낸다. 제목은 『무족영원』이다. 이민하의 『환상수족』이 연상되는 이 시집은 이전의 신해욱의 느낌을 전복시키고 있었다. 시집의 뒷면은 글자들이 세로와 가로로 날뛰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글자들은 틀을 벗어나 끊임없이 지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전위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시도에 나는 금방 빠져들었다. 바코드까지 점령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헛된 생각도 하기도 했다. 또, 그러면 혹시 시집을 거꾸로 읽어도 상관없을까? 하고 뒷장부터 펼쳐보았다. 그랬더니 시인의 말과 비슷한 크기의 자서가 등장했다. 이 위치는 생소했지만 마음에 들었다. 물론 앞 장에도 시인의 말이 있다. 하지만 진짜 시인의 말은 이곳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취히리?"
하나가 물었다.​

"취히리."
하나가 답했다.​

"취리히……"
하나가 먼 데를 보았다.

​2019년 12월
신해욱

신해욱, 『무족영원』, p129

 

시인은 스위스의 취히리로 추정되는 고유명사를 묻고, 답하고, 말을 잇지 못한다. 취히리는 고유명사지만 목적을 갖지 않고 있다. 왜가 결여된 물음과 답변은 일반적인 질문과 대답과는 다르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취히리는 무소속성을 띈다. 하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는 취히리와 비슷하게 포괄적인 누구를 이야기한다. 그 누구는 시인일 수도 있고 너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다. 어디에도 속할 수 있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 수 있다. 취히리에 있을 수 있고, 과거에 갔다 왔을 수 있고, 가고 싶을 수 있고, 누군가가 갔다왔을 수도 있다. 모든 가능성을 열러놓고 시집은 끝나거나 시작된다.

 

이러한 무소속성은 이번 시집을 아우르고 있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흐름 속에서 우리는 어떤 시간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무소속성은 경계를 허물기 시작한다. 그러나 신해욱의 간결함마저 허물기 시작했다. 본인의 장점을 허물면서 그럴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럼 이 시집은 신해욱이라고 불린 사람이 썼을 수도 있고,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떤 피조물이 시를 썼고, '당신은 신해욱?' 물어봤을 수도 있다. 기존에 알고 있었던 것은 '다 틀렸'을 수도 있다. 다시 생각하기 위해 모든 걸 깨트린다. '이 파티를 망치기 위해, 부정하기 위해'.

 

그래도 신해욱은 남아 있다. '뚱뚱한 요정'처럼 널찍해지긴 했지만, '단순해지려'라는 마음은 남아있다. '일관성을 잃은 믿음'은 독자들에게 생소한 신해욱이 되었지만, 그 안에서 '다음엔 꼭 문장을 나눠먹고 싶은' 시인의 '기다림'은 계속된다. 시인의 자라남에 대한 질문('우리는 자라서/무엇이 될까')은 때론 답이 없는 삶에 대한 하소연으로 들리기도 한다. 시인은 이를 '음을 영원히 놓친 가수의 표정'이라는 재치있는 관찰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기다리지만 끝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만족하지 못하는 무소속의 인간이 된다. 속했지만 벗어나려고 하며, 벗어나지만 다시 속하려는 모순 속에서 시인은 시간의 흐름을 보았고, 성장을 보았다.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무소속 안에서 시인은 한 가지만은 확신한다. '틀리지 않은 웃음'을 위해 '틀리는' 우리라는 사실. 또 '다 같이 야맹증을 앓아야 한다는 있다'는 사실. 앞이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걷는 무족영원의 세계이다. 처음일 수도 있고 마지막일 수도 있는 시 「 아케이드를 걸었다 」에서조차 우리는 걷는다. 웃을뻔했고 누군가들이 앞질러간다. 그래도 걷는다. 시간은 흐른다. 내가 기다린다. 시간은 흐른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물론 속하는 척은 했다.

 

놓고 왔을 리가 없다 나는 뒤를 돌아본다​놓고

왔을 리가 없다 뒤를 돌아본다​

여름이 가고 있다 좋은 생각이 나려고 한다​

여름이 가고 있다 이사 철이 오고 있다​

여름이 가고 있다 우리를 이루는 서로 다른 물질

​의지하여 늙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여름 내내 나는 떠날 준비를 하다 만 자세로 지팡이에​

여름이 가고 있다 지팡이는 견고했다​

여름이 가고 있다 썩는 것들은 충분했지​

뭐라도 하며 나는 그의 환심을 사고 싶었지만 같은 시간의 같은 사건 속에 우리는 엮일 수는 없었습니다​

여름이 가고 있다 뭐였을까​

여름이 가고 있다 여념이 없었지

​여름 내내 그는 아름다운 지팡이의 끝으로 흙바닥에 뭔가를 적어보려 했습니다

​여름이 가고 있다 물론 비가 많이 왔지​

여름이 가고 있다 물론 뜨거웠다


신해욱, 「여름이 가고 있다」 반대로 읽기
 
무족영원(문학과지성 시인선 535)
정제된 언어와 견고한 형식으로 주목받아온 신해욱의 네 번째 시집 『무족영원』. 5년 만의 신작으로, ‘나’에 대한 탐구로 조금씩 ‘너’라는 타자를 꿈꾸게 된 저자가 비로소 실족(失足)이라는 투신의 자세로 써 내려간 과감하고 애틋한 고백이다. 저자는 이번 시집을 하나의 무족영원류로 만들고자 한다. 그것은 뒤쪽에 위치해야 할 3부의 시편들이 1부를 앞질러 놓여 있는 형식이나 ‘시인의 말’을 반으로 나누어 책의 처음과 마지막을 연결시켜놓은 구성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머리와 꼬리를 구분하지 않으려는, 시작과 끝의 경계를 지우려는 저자의 노력은 무한한 궤도의 원형을 추구한다. 그렇지만 저자는 자신이 불완전한 반원에 갇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그래서 다른 반쪽을 찾기 위해 반원의 형태로 전진하며 온몸으로 이 세계의 내부를 향해 파고든다.
저자
신해욱
출판
문학과지성사
출판일
2019.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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