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생태계/주류산업

근대도시 대전, 최초의 공장형 양조장 후지추(富士忠) 양조공장에 대해서

미아스마 2022. 12. 5.

ⓒ 대전세종연구원, 대전 지역기업의 형성 및 성장 과정에 대한 연구ㅣ붉은 동그라미 부분이 후지추 양조공장


공장형 양조장 후지추(富士忠) 양조공장

1.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1900년대 대전은 지금처럼 빵의 도시도 아니고, 과학의 도시도 아니었다. 바로 양조의 도시였다.

2. 당시 대전은 생기지 얼마 안 된 신생 도시였고 제조업 공장들이 조금씩 들어왔던 도시였다. 이때 생겼던 제조업 공장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금강양조장, 삼성양조장, 보문양조장, 대흥양조장, 부사(富士)제와공장, 후지추장유공장 등이 있었는데 양조장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 그중 가장 규모가 컸던 양조장은 후지추(富士忠) 양조장이다. 이름에서 예상이 가듯이 일본인이 세웠던 양조장으로 1909년 시가현 출신 쓰지 겐노스케(辻謹之助)가 설립했다. 이후에 그의 아들 쓰지 만다로(辻萬太郞)가 이름을 후지추로 고치고 번창시킨다.

4. 1930년대 후지추 양조장은 상당한 규모의 회사로 성장한다. 1938년 기준으로 쓰지 만다로는 대전 시내의 땅 32,897평을 소유하게 되는데 이는 5번째로 많은 땅 소유자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또한 만주에도 지점을 둘 정도로 번성하는데 이러한 명성에 따라 쓰지 만다로는 만주, 조선 양조의 영웅이라고 불릴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 대전근현대전시관ㅣ후지추 양조공장의 사장 쓰지만타로(辻萬太郞)


5. 이 양조공장에서는 간장, 된장, 조선술, 청주, 누룩(대전 내 공급)을 주로 생산하고 판매했다. 1932년 연간 24만 3천 원 정도의 판매액을 기록하였고, 이 금액은 당시 소 500 마리 정도의 값이라고 추정된다. 1935년에는 주식회사로 상장되었고 공장도 4개까지 늘렸다. 해방 직전에는 영업사원이 20명, 생산노동자가 30명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

6. 재밌는 점은 일제강점기에도 불구하고 후지추 양조공장은 공장 노동자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기로 소문이 났다는 점이다. 이는 대표인 만다로가 대전을 자신의 고향처럼 생각하고 조선인들을 가족처럼 챙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만다로가 해방 이후 일본으로 돌아갈 때 노동자들이 그의 짐을 지고 교토까지 배웅해 주었고, 그의 유골의 일부가 보문산 자락에 묻혔다고 한다.

 

7. 만다로의 후지추 양조공장은 대전의 역사 속의 제조업 공장에서 그친 것이 아닌 미래 창업을 하게 될 기업가들을 많이 키워냄에 의의가 있다. 대표적으로 남선기공의 손중만, 대창식품의 유관득, 진미식품의 송희백 등이 후지추 양조공장에서 근무하면서 창업의 꿈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참고문헌

1. 대전광역시사편찬위원회, 『대전시사자료집 Ⅸ』, 대전시사총서 제 17집, 2014

2. 대전광역시 이츠 대전, 2008년 1월호, 최장문, 2008

3. 대전발전연구원, 대전 지역기업의 형성 및 성장 과정에 대한 연구 (1), 임상일 외, 2015

4. 디트뉴스24, 조선 최고 양조 장인 보문산에 혼백 묻다, 최장문, 2011

5. 쓰지만다로(辻萬太郞), ぽぽぷらとぱかち, 쓰지만다로 自敍傳, 1978

6. 중도일보, 대전을 사랑했던 일본인 기업가의 이야기, 금상진 기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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